가을이 다가오는 것은 서늘해진 저녁바람으로도, 좀 더 높아진듯 푸른 하늘로도 알 수 있지만, 향기로도 알 수 있다. 여름의 뭉글뭉글한 바람이 모서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오묘한 향기. 계절의 변화는 코 앞에서도 느껴진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향기는 따뜻해지고, 외투와 함께 무거워진다. 찬 바람이 불 때에 어울리는 향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깊이 있고, 오래 가고, 낙엽처럼 쌓이는 향기들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배열해 보았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도 나열해본다. 이끼의 녹색, 높은 하늘, 낙엽의 색깔, 워커, 커피, 가죽과 좋은 음악 등등... 이리저리 끄적이다가 4가지 향기를 만들었다. 


아직 이름을 정하지 않은, 희고 둥글고 양감이 느껴지는 향기는 백자를 닮았다. 오랜만에 알데하이드를 사용했다. 오렌지 꽃과 아몬드, 흰 꽃들과 화이트머스크 등등 새하얗지만 가볍지는 않은 향기들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었다. 

"녹주"라고 이름붙인 향기는 고전적인 오리엔탈의 느낌에 진한 녹색의 가을 바람 같은 향기를 더하고자 했다. 바이올렛과 라벤더, 재스민과 모스 등등 서늘하고 차분하게 가라앉는 향기들이 외투 속에 한 겹 감기듯이 뿌려지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온전히 내 취향이 반영된 깊고 풍부한 향기! 

가을의 풍경을 떠올리다 보면 '선'이 떠오른다. 점,선,면 할때 선. 왜 그런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길게 떨어지는 가을의 외투들과, 넓어진 듯 선명해진 지평선, 가을 노을 아래에서 이리저리 엉키는 전봇대줄들이 연상되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향수의 이름은 "선". 

깔끔하고 은은한 가을의 선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양하지만 소담한 꽃향기들을 사용했다. 살짝 톡쏘듯이 선을 긋는 진저는 포인트로. 마무리는 역시 서늘한 모스와 우디, 머스크, 그리고 약간의 꽃향기 더! 끝까지 향기로운 가을을 위해서 꽃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좀 더 씁쓸하고 쓸쓸한 가을을 그려보고자 페티그레인과 무게감 있는 우디를 사용한 향기도 만들었다. 스모키한 향취에 번지듯이 섞여드는 흰 꽃의 향기들은 씁쓸하지만, 마무리는 살짝 달큰하고 기분좋은 묵직함으로 끝맺는다. 처음 만들때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스파이시해서 당황스러웠지만, 맡아볼 수록 중독되는게 역시 내가 만든 내새끼가 최고다. 잔향에서 느껴지는 스모키함과 바닐라, 우디향의 조화가 마음에 든다. 향에 남녀를 구분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남성이 쓰면 더 매력적일 것 같은 느낌이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오면, 좀 더 다양한 가을을 느껴보고 더 풍부한 향기를 만들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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