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광고만큼 환상으로 가득한 광고가 또 있을까? 시각적 이미지로 향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향수회사들은 수많은 판타지와 화려한 상징들을 이용한다. 아름다운 여배우는 향기를 입고 여신으로 변신하고, 향수를 펌핑하는 순간 일상은 환상이 된다. 

신화의 세계는 신비롭고, 화려하고,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낯선 곳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향기와 절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신화와, 내게 신화속 장면을 연상시키는 향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다나에와 황금비, 찬란한 Chance

Gustav Klimt's Danaë, 1907
Gustav Klimt's Danaë, 1907

So Danaë endured, the beautiful,

To change the glad daylight for brass-bound walls,

And in that chamber secret as the grave 

She lived a prisoner. Yet to her came

Zeus in the golden rain. 

   

- Edith Hamilton, Mythology 

                                                                

그리스 신화 속 아르고의 왕 아크리스우스에게는 아름다운 딸 다나에(Danaë)가 있었는데,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그가 왕을 살해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다나에를 청동으로 된 탑에 가두었다. 어느 날, 탑 안으로 황금빛 비가 쏟아져 내렸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신해서 다나에를 유혹한 것이다. 그리고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영웅 페르세우스이다. 페르세우스의 모험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다나에의 이야기에, 나는 푹 빠져들었었다. 청동 탑으로 떨어져 내리는 찬란한 황금비의 이미지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Chanel Chance
Chanel Chance

모든 향수가 특별하지만, 그 중에서도 샤넬 샹스(Chanel Chance)의 향은 내게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릴 적 엄마의 가방에서 이 향수를 처음 접하고 나서, 처음으로 향기가 황홀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샹스의 향은 황금빛 빛방울이 떨어져 번지듯이 황홀했다. 반짝반짝하고, 부드럽고, 화려한 향기가 방 안에 퍼져나가면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파인애플의 달콤함과 밝은 빛의 레몬향, 재스민의 존재감있는 우아함 아래에 스며든 패츌리의 무게감이 고전적이면서도 낯선 조화를 만들어낸다. 금빛의 묵직함과, 빗방울 같은 가벼움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향기는 언제나 내게 다나에의 신화를 떠오르게 한다. 지친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환상이 필요할때, 신의 유혹같은 향기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메데이아, 사랑과 마법, 그리고 비극의 Obsession 


Anthony Frederick Augustus Sandys - Medea
Anthony Frederick Augustus Sandys - Medea

메데이아(Medea 혹은 메디아)는 영웅 이아손과 테세우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법사로,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의 딸이며 헤카테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였다. 황금 양털을 얻기 위한 이아손의 모험에서, 그녀는 이아손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하고 그를 돕기 위해 마법의 힘을 사용한다. 황금 양털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이아손은 놋쇠발을 가지고 불을 뿜는 황소 두 마리를 쟁기에 매어야 했고, 용의 이빨에서 나온 병사들을 퇴치해야 했다. 메데이아는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부적을 주고, 용의 이빨에서 나온 병사들 틈에 돌을 던지는 계책을 알려주었다. 황금 양털을 지키는 용을 잠재우기 위한 묘약까지 만들어 준 메데이아 덕에 이아손은 무사히 황금 양털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부친 아이손의 노쇠함을 걱정하는 이아손의 부탁에, 마법을 통해 아이손에게 젊음을 되찾아주기도 했다. 메데이아의 이아손에 대한 사랑은 이아손의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에서 추방했던 숙부 펠리아스에게 복수를 대신하는 일에까지 이른다. 아이손에게 했던 것처럼 젊음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한 뒤, 묘약이 아닌 그냥 끓는 물이 담긴 솥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헌신적이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그녀의 사랑은 이아손에게 충분히 보답받지 못했다. 이아손은 크린토스의 왕녀 크레우사와 결혼하기 위해 메데이아를 버렸고, 분노한 메데이아는 크레우사에게 독을 넣은 옷을 선물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심지어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메데이아는 뱀이 끄는 마차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쳐 훗날 영웅이 되는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과 결혼하였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자극적이고 강렬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메데이아는 과연 악녀인가? 사랑의 피해자인가? 

메데이아에 대한 신화는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지며, 많은 문학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Calvin Klein - Obsession
Calvin Klein - Obsession

메데이아의 마법처럼 강렬하고, 비극적인 이야기처럼 인상적인 향을 가진 향수, 옵세션(Obsession)은 이름처럼 쉽게 떠나가지 않는 향기를 남긴다. 스파이시한 동시에 파우더리한 향기는 열렬하고도 애절한 사랑을 했던 메데이아를 떠오르게 한다. 짙고 무거운 우디향과 앰버, 강한 향신료와 장미향, 시벳캣 등 관능적인 조합이 진한 사랑의 묘약처럼 피어오른다. 약간 머리가 아파올만큼 풍성하고 농축된 듯 강한 향은 충분히 노골적이지만, 저렴하지 않은 아우라를 풍긴다. 헤카테 여신의 신전에서 이런 향이 난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향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Obsession EDP는 할머니가 물려주신 것이다. 조심스럽게 향수를 시향지에 묻힐때마다, 나는 메데이아의 신화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동시에 떠오르는 기묘한 체험을 한다. 그러니, 내게는 정말 마법과 같은 향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진하고 무거운 향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가끔은 끝없는 깊이를 가진 향기속에 빠져보는 것 역시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자극적이고 잊을 수 없는 향기를 가진 옵세션은 한 번 시향하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마법같은 기억을 남길것이다.  


사랑을 아는 남자의 향기, Eros

Cupid in a Tree (1795/1805) by Jean-Jacques-François Le Barbier
Cupid in a Tree (1795/1805) by Jean-Jacques-François Le Barbier

에로스(Eros), 혹은 큐피드(Cupid)로 알려진 사랑의 신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그리스 신화 속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여 사랑의 화살을 쏘아 연인의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이다. 그림들 속에서는 주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작고 앙증맞은 날개를 달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프시케와 에로스 신화를 다룬 그림 속에서는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Anthony van Dyck - Cupid and Psyche
Anthony van Dyck - Cupid and Psyche

사랑의 신이 사랑에 빠진 순간, 그는 성장했다. 에로스는 성적인 욕망과 사랑을 다루는 신이며, 프시케(Psyche.싸이키)는 영혼을 상징한다. 두 사람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는 쾌락의 여신 헤도네(Hedone)이다. 

Versace Eros
Versace Eros

Eros is truly the DNA of the house of Versace.

This is a fragrance for a man who is his own master. 

He is a hero: a man who defends their ideas and goals.

-Donatella Versace

2012년 출시된 베르사체의 향수 Eros는, 그리스 신화의 사랑의 신 에로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다. 그리스 신전의 조각상처럼 서있는 모델과, 메두사의 머리가 박힌 바틀이 인상적인 광고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향기는 통통한 아기천사 같은 에로스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아는 남자를 위한 향기이며,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말했듯이 영웅을 위한 향기이다. 

Eros의 광고영상 속 모델의 모습은 에로스 신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쩌면 에로스에게 도전하는 인간 영웅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모습은 마치, 지상의 에로스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신에대한 선전포고 같아 보인다. 

이처럼 강한 남성성이 강조된 광고 이미지를 가진 향수이기 때문에, 실제로 향기를 맡아보면 의아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달콤한 바닐라가 두드러지는 에로스의 향기는 전형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향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탑노트의 민트와 레몬, 사과향이 활동적인 남성의 향기를 연상시키지만, 곧 부드럽고 끈적한 바닐라와 통카빈의 달콤함이 올라온다. 거기에 오크모스와 우디의 드라이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이 추가되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베르사체의 에로스는 남성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향수이지만, 개인적으로 향수에 성별을 구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니, 중성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요소들이 있는 향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섹시하고 도전적인 향기를 찾는 사람이라면 남녀 누구나 한번쯤 시도해 볼만한 향이다. 

Versace Eros pour Femme
Versace Eros pour Femme

Eros 이후 베르사체는 여성을 겨냥한 Eros Pour Femme 또한 출시했다. 하지만 내게는 Eros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Eros와 마찬가지로 관능적인 이미지가 강조된 광고와, 고급스럽고 성숙해 보이는 금빛 바틀과는 달리 Eros의 짝인 프시케, 혹은 페르세포네에게 어울릴법한 향을 가졌다. 특히 탑노트의 달콤한 석류향기는 페르세포네를 연상하게 했고, 전체적으로 묵직하고 관능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산뜻하고 플로럴한 봄향기에 가까웠다. 어쩌면 전형적이라고 느껴질수도 있는 "여성향수"의 느낌인지라 전작 에로스 같은 신선함을 원했던 내게는 실망스러웠지만, 달달한 꽃향기를 찾는 이들에게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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